2020년에 개봉한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5년을 배경으로 고졸 여직원 3명이 기업 내부의 비리를 파헤치는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단순한 직장인 영화나 코미디가 아닌, 시대상과 성차별, 조직 내부의 부조리를 여성의 시선으로 담아낸 사회 풍자극이자 성장 서사입니다. 특히 여성 캐릭터들의 우정과 연대, 그리고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의지가 중심에 놓이며 기존 한국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여성 중심 서사를 완성했습니다. 개봉 당시에도 호평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금 조명되며 OTT를 통해 다양한 세대의 시청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여성서사의 진화
한국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오랫동안 주변 인물이거나, 남성 주인공을 보조하는 역할로 등장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전면에 세 명의 여성 캐릭터를 내세우며, 그들의 이야기와 감정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영화의 주인공 정유나, 심보람, 이자영은 모두 대기업 ‘삼진전자’에서 일하는 고졸 여직원으로, 실력은 있지만 학력의 벽 앞에서 승진은 물론, 제대로 된 업무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들은 ‘토익 점수 600점 이상’이라는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영어 수업을 듣는 ‘영어토익반’에서 만나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단순한 공부 모임이었지만, 어느 날 정유나가 우연히 회사 공장에서 일어난 폐수 유출 사건을 목격하면서 이들의 관계는 단단한 연대의 형태로 발전합니다. 이후 세 사람은 각자의 능력을 발휘해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힘을 모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화가 이들을 단순히 '피해자'나 '영웅'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세 주인공은 모두 현실에서 상처받고 갈등하며, 때로는 실패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서로에게서 힘을 얻고 성장해 나갑니다. 기존 남성 중심의 서사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여성들 간의 유대감'이 주요한 테마로 떠오르며, 단순한 직장 영화가 아닌 감정적 서사로도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특히 이들의 우정은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전개되며, 연대의 힘이 어떻게 변화를 이끌어내는지 보여줍니다.
현실풍자의 정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현실에 대한 냉철한 관찰을 바탕으로 유쾌하게 풍자하는 데 성공한 작품입니다. 영화의 배경은 1995년으로, 한국 사회가 본격적인 글로벌화를 앞두고 있었던 시기입니다. IMF 외환위기 이전, 대기업 중심의 산업 구조가 공고했던 이 시기에는 학력 중심의 승진 제도, 권위적인 조직문화, 여성 노동자의 구조적 차별이 뿌리 깊게 존재했습니다. 영화는 이러한 당시의 분위기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고졸 여직원은 회식 준비, 상사의 심부름, 복사와 커피 심부름 같은 단순 반복 업무만을 맡게 되고, 능력이 있어도 정규직 승진에서는 철저히 배제됩니다. ‘여직원은 웃는 얼굴이 무기’라는 상사의 대사는 성차별적 인식을 그대로 드러내며 관객의 분노를 유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분노를 무겁게만 전달하지 않고, 풍자와 유머를 통해 현실을 재치 있게 꼬집는 것이 영화의 또 다른 미덕입니다. 더불어 영화가 다루는 환경 문제와 기업 비리는 단지 시대적 배경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입니다. 기업이 환경오염을 은폐하고, 내부 고발자를 탄압하며, 언론과의 유착을 통해 사건을 무마하려는 모습은 현실에서 자주 목격되는 장면입니다. 삼진전자가 벌인 폐수 유출 사건과 그 은폐 과정을 세 주인공이 추적해 나가는 이야기는 단지 드라마틱한 플롯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합니다.
재조명되는 이유
개봉 당시에도 좋은 평가를 받았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꾸준히 언급되고 있는 이유는 뭘까요? 첫째, 시대를 초월한 공감대를 제공한다는 점입니다. 1990년대의 배경과 복고적 요소가 있지만, 주제 자체는 여전히 유효한 ‘직장 내 성차별’, ‘불합리한 조직문화’,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입니다. 오늘날 직장인, 특히 여성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문제들이 영화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세대와 시대를 넘는 울림을 줍니다. 둘째, 이 영화는 ‘여성 캐릭터 중심의 상업 영화’로서 드문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세 주인공 모두 능동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며, 어떤 남성 캐릭터에게도 의존하지 않습니다. 이는 여성 관객들에게 특히 큰 호응을 얻었고, 영화계 내에서도 중요한 사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셋째, 완성도 높은 연출과 디테일도 꾸준히 호평을 받는 이유입니다. 90년대 사무실 풍경, 복고풍 의상과 소품, 당시 유행어와 노래까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어, ‘추억의 한국’을 체험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순 없어도, 우리 주변은 바꿀 수 있어요."와 같은 명대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울림을 주며, 시대와 세대의 경계를 허뭅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단순한 직장 코미디가 아닌, 여성 서사의 전면화, 사회 부조리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 그리고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대를 지닌 작품입니다. 지금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주제를 통해 많은 관객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전합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또는 다시 보고 싶다면, 지금이 좋은 기회입니다. 넷플릭스, 웨이브 등 주요 OTT 플랫폼에서도 감상할 수 있으니 현실 속 공감을 찾고 싶은 이들에게 적극 추천드립니다.